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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한국 전쟁

한국 전쟁(4)_초기 작전_서부지역_옹진반도 전투


앞으로 초기작전 기간(6.25 ~ 6.28) 동안의 주요 전투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보자 한다. 초기작전은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진행방향에 따라 서부지역 작전, 중서부지역 작전, 중동부지역 작전, 동부지역작전으로 나누어 포스팅할 예정이며 그 시작으로 최서쪽 옹진반도 전투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초기작전 기간의 주요 전투들이 끝난후에도 계속해서 한국전쟁의 진행경과에 따른 주요 전투들을 알아가볼 예정이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작전 경과 요도)


1. 개 요 

  • 옹진반도에서 6. 25 ~ 6. 26에 거쳐 한국군 독립 제 17연대가 전차 1개 중대로 증강된 적 제 6사단 14연대와 38경비 제 3여단과 맞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2. 양군 편제 및 아군부대 상황


  • 아군부대 상황

- 연대본부 : 탄지말(옹진 북쪽 2km 지점)

- 좌전방, 제 1대대 : 두락산 ~ 호동(리동) 간 13.5km

- 우전방, 제 3대대 : 호동(리동) ~ 초동(오남리)간 17.8km

- 연대예비, 제 2대대 : 탄지말에 집결 주둔

- 지원부대 : 탄지말 옹진 냉정리에 분산 주둔


3. 전투 전개

  • 전개 과정 : 6월 25일 04:00부터 30분간 아군 방어지대를 향한 공격준비 사격 → 태탄~옹진 접근로를 따라 조공(기마대), 취야~양원~강령 축선을 따라 주공(전차)이 아군 방어지대를 향해 진격 → 적의 기습으로 좌전방의 제 1대대장 전사 및 주저항성 돌파 허용 → 예비대인 제2 대대의 좌전방 구원 및 역습(성공)  → 우전방의 제3 대대 역시 기습으로 돌파 당하며 양원~강령간 적 진격 허용  → 아군이 적군에 의해 동서 양분(동 : 연대 본부 및 3대대, 서 : 1대대 및 2대대)되어 동쪽으로는 부포항, 서쪽으로는 사곶항을 통해 각각 인천과 군산으로 해상 철수

  • 내  용

6월 24일 방어태세 강화에 여념이 없던 아군 장병들은 이날따라 한밤중까지 계속된 적의 대남방송에 귀를 막으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적이 남침을 개시한 6월 25일 옹진반도 일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04:00쯤 돌연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피어올랐다. 이를 신호로 적은 38도 분계선 북쪽에서 각종 포의 포문을 열고 아군 방어지역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적의 공격준비사격이었고 30분 후에는 사격이 연신되면서 약 1개 대대 규모로 추산되는 적이 제 1대대의 주저항선으로 밀어닥쳤다. 이때 최전방에 배치된 아군 2개 중대는 백병전을 치르면서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워낙 우세한 적에게 압도당한 데다가 기선을 장악한 적이 후속부대를 계속 투입하였으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적의 공격준비사격으로 모든 유선망이 절단되고 무선마저 두절된 상태에서 철수병력으로부터 상황을 확인한 제 1대대장은 즉시 예비대를 투입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대장 김희태 소령은 적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무렵 우전방의 제 3대대 또한 주저항선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치마산~석계리 선에서 방어진지를 급편중에 있어 강령과 양원이 위협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장은 하나밖에 없는 연대 예비대로 하여금 좌전방대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도록 조치하였다. 
 연대장의 역습명령을 받은 제 2대대장(소령 송호림)은 말제 일대에 2개 중대를 전개하여 상황추이를 살피던 중 전술행군대형으로 유유히 남하하는 적 1개 대대 규모를 기습사격으로 격멸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제1대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때 연대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되었다. 옹진반도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알 길이 없던 제 2대대장은 철수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였으나 연대본부와 지원부대들이 강령으로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직후 제 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냉정리 부근의 불당산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이미 양원과 강령이 적의 수중으로 떨어진 후여서 대대장은 부포로의 이동을 포기하고 사곶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우일선의 제 3대대 지역에서는 적의 주공인 제 14연대가 05:30까지 포사격만 계속할 뿐 공격제대는 기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군 포병은 적의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야 응사하기 시작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미 고문관이 105mm 포의 사격을 통제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이윽고 적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주저항선을 돌파하였다. 대대장(소령 오익경)은 철석같이 믿고 있던 57mm 대전차포가 적 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하자 당혹감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연대의 증원이 불가능함을 직시하고 치마산~석계리로 철수, 제 9·10중대로 지연진지를 급편하게 되었다. 치마산 기슭에 배치된 제 10중대는 병사들이 전차 출현에 당황하여 조급하게 선제사격을 가한 탓으로 적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되어 강령으로 분산 철수하고 말았다. 
 반면 석계리의 제 9중대는 저수지 옆에 있는 애로에 종심 깊은 저지진지를 편성하였다. 얼마 후 적의 전차장들이 상반신을 노출시키고, 후속하는 보병부대들은 전술행군대형을 유지한 채 아군의 살상지대로 들어섰다. 제 9중대 장병들은 적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여 기습사격으로 격멸시켰다. 그러나 초전의 패전을 설욕한 아군 장병들의 벅찬 환호도 잠시일 뿐 전열을 가다듬은 적의 반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제 9중대는 강령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연대본부와 직할대는 주저항선이 돌파될 무렵에 이미 강령을 경유 부포항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적이 강령을 점령한 후 남진을 계속하고 있을 때 강령강 제방에 배치된 대전차포중대는 근거리 사격을 퍼부어 적 전차 3대와 장갑차 2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강령에서 낙오병을 수습한 제 3대대는 죽교리~중기동 선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였으며, 공병대는 적 전차가 우회하기 어려운 조촌교를 폭파시켰다. 그런데 이처럼 아군이 지연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적은 추격하지 않았다. 후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때 적 제 14연대는 강령을 점령한 후 38경비 제 3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25일 오후에 해주를 경유, 영정포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25일) 23:30에 해군 LST-801함이 부포항에 접안하였다. 독립 제 17연대는 제 3대대와 지원부대를 축차적으로 철수, 승선시켰으나 탑재 불가능한 모든 장비와 물자는 소각하거나 바다 속에 밀어 넣었다. 이때 105mm 곡사포 1문만은 남겨놓았다. 
연대장은 적이 부포항 부근까지 접근하였을 때 병력 승선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LST-801함을 출항시키고 자신은 제 7야전포병대대장과 더불어 적에게 포격을 계속하다가 조각배를 타고 부포항을 떠났다. 그 후 연대장과 포병대대장은 연평도에서 해군함정을 만나 28일 아침에는 인천에 상륙하여 수원으로 이동하였으며,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군예비가 된 독립 17연대는 대전 선화국민학교로 이동하여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한편 제 2대대는 낙오병력을 수습하여 400여 명의 병력으로 불당산에서 재편성하였으나, 옹진에 이미 적의 선견대가 진출한 상황을 확인한 후 사곶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대대장이 연근산 부근에 이르렀을 때 연대 정훈관인 한서한 중위로부터 “제 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사곶항으로 철수하라”는 연대장의 철수명령을 받았다. 
연근산에서 다시 300여 명의 낙오병력을 수습한 제 2대대는 25일 저녁에 철수를 개시하여 2시간 후에 사곶항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는 낙오병이 계속 몰려들어 1,300여 명이 되었고 경찰과 일반주민을 합쳐 해상철수 대상인원이 2,000여 명이나 되었으나 선박을 구할 수가 없었다. 
적의 추격이 예상되는 그야말로 진퇴유곡의 긴박한 상황 하에서 동분서주하던 제 2대대장은 사곶항 맞은편에 있는 용호도의 지서주임 김두의 경사의 주선으로 대성호(20톤급 기관선, 정원 90명)를 지원받아 다음날 아침까지 군인과 경찰을 실어 나르고 민간인 수송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사곶항 부근에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수송작전을 중단하게 되었다. 
용호도에서 다시 20톤급 동력선을 비롯한 대형 화물선 6척을 획득한 제 2대대는 연평도를 경유 29일에는 군산항에 상륙하여 대전에서 본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돈츄의 Super S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