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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2차 세계 대전

[미국]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_1. 소개


미군 최초의 전차 부대 지휘관, 미군 대전차 군단의 영웅, Old blood and guts, 싸움닭, 전쟁광, 미친 카우보이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별명에서부터 터프함이 묻어 나오지 않은가?  필자는 이 별명의 주인공인 미국의 전쟁영웅,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 장군에 대해 Save 해보고자 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패튼 장군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을 작성하고 뒤이은 포스팅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뤄볼 예정이다. 출발.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이하 패튼) 장군(1885. 11. 11 ~ 1945. 12. 21)은 2차 세계 대전 지중해 및 유럽 전선에서 활약한 고위 장교이다. 특히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뒤이은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의 돌파작전에서 미 육군 제 3군을 이끌며 맹활약한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85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엘리트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버지니아 군사 학교에서 1년 수학중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성적 부진으로 1년 유급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09년에 전체 차석으로 졸업 한다. 군인으로서 뛰어난 집안배경에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니 엘리트 금수저 군인 되시겠다.

졸업후 기병장교로 복무 하던중 1912년 스톡홀름에서 개최한 하계 올림픽에 출전하여 근대 5종 종목에서 5위를 기록한다. (여러모로 타고난 군인이다.) 올림픽에서의 활약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패튼은 군 최연소 검술교관이 되어 기병검술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며 'Patton Sword'로 알려진 M1913 기병도(Cavalry Saber)를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패튼은 1916년 판쵸 비야 원정(멕시코의 혁명 영웅 판쵸 비야가 자행한 미국인 마을 습격 사건에 대한 보복 원정)에서 퍼싱 장군의 수하로 참전하였는데 판쵸 비야 측 지휘관 두명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자신의 차량 본네트에 매달고 복귀하는 활약(이라고 쓰고 기행이라고 읽는)을 하며 일약 스타가 된다(실제 신문에도 실렸다고 한다.)

이후 미국이 1차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참전군 사령관이 된 퍼싱장군은 그를 대위로 진급 시키고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이후 패튼은 여러 승전과 미국 전차병들을 위한 전차학교를 설립하는 공을 인정받아 소령을 거쳐 중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1918년 9월 생미헬 전투에서 진흙탕에 빠진 전차를 끌어내는 일을 돕다가 기관총에 허벅지 관통상을 입어 전장에서 이탈하게 되는데 그가 다시 군에 복귀 했을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다. 이 시기 패튼은 전차의 전술적 가치를 깨닫고 철저한 기갑부대 신봉자가 된다.

전후 패튼은 기갑부대 창설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전차의 유용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차의 활용과 전술에 관련된 글을 기고 하기도 한다. 또 무선기와 마운트 운용 등 미 육군의 기갑 부대 교리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차 세계 대전 발발당시 패튼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 2기갑사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루이지애나와 캐롤라이나 등지에서 2차 세계 대전 참전 대비 기동훈련을 하고 있던 중 새롭게 조직된 제 1기갑군단의 지휘관에 임명됨과 함께 북아프리카 침공을 위한 횃불 작전 임무를 부여받는다.

패튼은 1942년 11월 횃불 작전의 계획에 따라 미 육군 서부군을 이끌고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성공적으로 상륙하면서 연합군이 지중해 통제권을 가져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독일군 북아프리카 군단에게 케셀린 요충지 전투에서 패퇴한 미 육군 제 2군단의 재건 임무를 부여 받아 성공적으로 군을 정비, 반격에 성공하여 독일군을 아프리카에서 격퇴하는데 일조한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성공으로 패튼은 미 육군 제 7군의 지휘를 맡아 시칠리아 상륙 작전에 참여하여 메시나와 팔레르모 점령등의 활약을 하며 명성을 쌓았으나 포로 학살, 야전병원에서 부하 구타 등의 구설수에 오르며 보직해임, 한직으로 좌천 된다. 그러나 연합군은 패튼의 명성을 이용하여 독일 정보국을 계속해서 교란 시켰는데 대표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불굴작전이라는 가상의 작전을 만들고 그 지휘권이 패튼에게 있는거처럼 하여 독일군을 교란하는데 성공, 노르망디에서의 대규모 상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수 있었다. 

그 이후 패튼은 전선에 복귀하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후속부대인  제 3군을 지휘하여 전선의 최우측을 맡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공격적인 전술이 빛을 발하게 되는데 그의 기갑부대 운용은 독일의 전격전 전술과 같았다. 패튼은 미군 전차의 기동성을 살려 독일군 방어선의 취약점을 찾아 종심 돌파 하였는데 보급속도가 그의 진격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연료부족으로 부대가 멈춰 설때까지 그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보급품 부족등으로 잠깐의 어려움을 겪지만 프랑스 메츠지역 수복과 벌지 전투로도 알려진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에서 바스토뉴에 고립된 제 101 공수사단(그렇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그 101 공수)을 구출하는 등 효과적으로 반격에 성공한다. 이후 독일군이 퇴각으로 돌아서자 패튼은 제 3군을 이끌고 독일 본토로 진입하는데 연합군 최초로 라인강을 건너버린다. 얼마 안가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세계대전은 종료.

전후 패튼은 바바리아(독일 바이에른 지역)의 군사 총독이 되었지만 이제 다시는 전쟁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실망과 군사 총독 자리에 대한 불편함으로 인해 이시기의 패튼은 굉장히 산만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미국으로의 귀환을 하루 앞둔 1945년 12월 9일 교통사고를 당해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며 12일만인 12월 21일 숨을 거두게 된다. 

패튼의 화려한 이미지, 열성적인 성격, 언사의 불경스러움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러한 터프함은 병사들의 사기진작 및 동기부여에 효과적이었고 신속하면서 공격적인 그의 전투스타일에 잘 부합하였다. 그는 독일군에게 고평가를 받으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오히려 아군에게 그의 거친 언행으로 인해 평가가 갈리곤 했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병사가 2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가 세간에 어떤 평가를 받든 위대한 군인이었음은 틀림없다.


"돈츄의 Super S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