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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2차 세계 대전

[미국]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_3. 초급장교 시절(上)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패튼의 첫 부임지는 일리노이 주의 포트 쉐리던의 15 기병연대였다. 부임후 일찌감치부터 그의 강성한 군인정신과 헌신의 자세는 그의 상관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1911년 후반에 고위 장교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는 버지니아의 포트 마이어로 전출되어 병참장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미 육군성 장관인 헨리 L. 스팀슨(Henry L. Stimson)의 보좌관 역할을 수행하였다.



패튼의 젊은시절을 이야기 할때 1912년 하계 올림픽 참가를 빼놓을수 없을것이다. 미국은 1912년 스웨덴 하계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근대 5종경기(수영, 크로스 컨트리, 사격, 승마, 펜싱)를 위해 군대에서 출전 선수를 뽑았는데 패튼이 선수로 선발된것이었다. 어찌보면 생도 시절부터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로서 학교의 각종 운동 기록을 수립하던 그였기에 그의 선발이 큰 이변이라고 말하기도 뭐하긴 하다. 특히 그의 펜싱 실력과 달리기 능력이 선수로 선발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올림픽 최초의 근대 5종 경기에는 총 42명의 선수가 출전하였는데 패튼은 수영에서 7위, 펜싱에서 4위, 승마에서 6위, 크로스 컨트리에서 3위, 사격에서 21위를 차지하며 전체 5위, 홈팀인 스웨덴 선수들을 제외하면 1위에 해당하는 호성적을 거두게 된다. 특별히 사격경기에서 해프닝아닌 해프닝이 있었는데 다른선수들이 22구경 권총을 사용한 반면 패튼은 38구경 권총을 사용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규격화가 안되었다니 요즘 같아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사격후 표적확인시 한발의 행방이 확인이 안되는것을 두고 패튼은 '구경이 커서 한번 맞춘곳에 다시한번 지나가서 안보이는것이다'라고 주장을 했지만 심판은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라고 판정을 내린것이었다. 만약 패튼의 주장이 맞았다면 그가 근대 5종 경기의 올림픽 초대 챔피언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912 올림픽 / 펜싱경기, 우측이 패튼)

(1912 올림픽 / 스타디움으로 들어오는 패튼)




1912년 올림픽을 계기로 패튼은 그의 검술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 프랑스 소뮈르 지방으로 건너가 유럽 챔피언이자 기병학교의 펜싱 강사였던 찰스 클레리에게 2주간 펜싱 레슨을 받게 된다. 다시 포트 마이어로 돌아온 패튼은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미군 기병대의 검술 전투 교리를 새롭게 정립했으며 그에 적합한 새로운 검을 직접 디자인하였다. 그는 일시적으로 육군참모총장 사무실에 배속되어 일을 진행하였으며 1913년, 후에 "패튼 스워드"로 유명한 "1913 Cavalry Saber"를 제작하였는데 초도 주문량이 20000개나 됐었다고 한다. 그 후에 패튼은 다시 프랑스 소뮈르로 돌아가 고등 검술을 수련하였고 그후에 캔자스에 있는 포트 릴리의 'Mounted Service School'로 가서 학생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패튼의 검술에 대한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미 육군 장교로는 최초로 '검의 달인(Master of the Sword)' 호칭을 얻게 되어다. 이는 검술 학교 최고의 강사에게만 주어지는 영예라고 한다.

1915년 6월 'Mounted Service School'을 졸업한 패튼은 필리핀으로 가는 15 기병연대(기존 소속 부대)로 돌아가기로 돼있었다. 필리핀은 변방이었기에 패튼은 그의 군인으로서의 커리어가 자칫하다가는 끝날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 때문에 전출전 11일의 휴가기간동안 그는 워싱턴으로 가서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설득하여 텍사스 포트 블리스의 8 기병연대로 재배치 받게된다. 내전으로 들끓고 있는 멕시코의 국경으로 말이다. 

한편, 패튼은 1916년 하계 올림픽에도 출전하기로 되어있었으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1913 Cavalry Saber, "Patton Sword")

 

"돈츄의 Super S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