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Dontyou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9월쯤이었을까요. 여전히 기적의 4강에 취해있던 저는 그간의 한국의 월드컵 역사에 대한 영상을 찾아보곤 했었습니다. 94년 월드컵. 황선홍의 볼리비아전 삽질, 스페인전 서정원의 동점골, 독일전 홍명보의 중거리슛골 등 분전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장면들도 박진감 넘쳤지만 무엇보다 제 기억속에 남는 선수가 있습니다. 월드컵 최초의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킥커로 나서 실축한뒤 망연자실하게 고개를 숙인 선수, 바로 조국 이탈리아를 결승전까지 올리고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시킨 장본인 '신성한 말총머리',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 입니다.
(1994년 월드컵 결승전 승부차기 실축 직후의 로베르토 바조.)
바조는 83년 세리에 C (3부리그)의 비첸차 팀에서 데뷔했습니다. 84/85시즌에 12골을 넣으며 팀을 세리에 B로 승격시키지만 시즌 말미에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부상을 입게됩니다.(이 부상은 그의 커리어내내 계속해서 그를 괴롭힙니다.). 이런 큰 부상와중에도 그의 능력을 알아본 세리아 A 소속 피오렌티나로 이적을 하게 되는데요. 무릎 부상 재발을 반복하면서 87/88시즌에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87/88시즌을 시작으로 3시즌간 총 52골을 기록하는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그동안의 공백을 무색케 합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1990년 당시 최고 이적료 150억 리라를 받고 이탈리아 명문 유벤투스로 이적하게 되면서 그의 전성기는 시작됩니다. 유벤투스에서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드필더 미셀 플라티니의 10번을 이어받은 바조는 매년 20골 이상을 넣는 맹활약을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92/93시즌에 30골, 93/94시즌에 22골을 기록하게 되는데 1993년 한해에만 39골을 넣었고, 당해 UEFA(현 유로파리그)컵 결승전에서는 1,2차전 합계 5골을 넣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와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93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를 석권하며 축구선수로써 최절정기를 보내게 됩니다.
1990년대는 이탈리아 월드컵(1990), 세리아 A 리그의 전성기(UEFA 리그 랭킹 1위) 등 이탈리아의 축구열기가 가장 강렬했던 시기로 이시절 화려한 플레이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바조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는데요. 뛰어난 득점력, 드리블, 패스, 그리고 감탄이 나오게 하는 센스있는 플레이는 경기장에 몰려온 관객들을 홀렸고 관객들은 그를 '판타지스타'라고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판타지스타(Fantasista)는 이탈리아 단어로 사전적 의미로는 재주꾼, 다재다능한 사람을 가리킵니다.(흔히들 알고 있는 Fatasy Star가 아닙니다! ) 판타지스타는 단어 자체로는 어떤 포지션이나 롤을 의미(트레콰르티스타 처럼)한다기보다는 선수에 대한 찬사에 가깝습다만 바조로 부터 생겨난 용어이기때문에 그와 비슷한 플레이를 하면서 그와 같은 스타성을 가지고 있는 선수를 판타지 스타라고 칭합니다.(델피에로, 안정환 등)
그렇다면 바조는 어떤 스타일의 선수 였을까요? 이에 대한 설명에 앞서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전술 포메이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축구 지도자들은 지역과 공간에 대한 압박을 통해 필드 전체를 자기 팀의 영향권에 두고 싶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최적화 된 전술로 4-4-2 포메이션을 사용하기 시작하는데요. 4-4-2는 공격수 2명, 미들필더 4명, 수비수 4명으로 서게되는 포메이션으로 지역적인 압박을 2중 3중으로 할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안그래도 수비가 타이트하기로 유명한 세리에 A에서 4-4-2로 대변되는 압박축구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경기가 더 타이트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타개책을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됩니다. 4-4-2 포메이션은 전방위 적인 압박은 뛰어나지만 리베로를 위시한 3백에 비해 대인마킹과 본연의 수비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를 활용하여 중앙 미드필더 2명과 중앙 수비 2명 사이에 해당하는 위치에 뛰어난 선수 한 명을 프리롤로 풀어놓는 전술이 등장합니다. 여기 서게 되는 선수들에게 요구 되는 능력은 첫째, 플레이 메이킹 능력(창조성, 패스, 시야), 둘째, 탈압박 능력(개인기, 드리블) 세째, 해결 능력(침투 능력, 결정력) 으로 다양한 공격 재능이 필요로 합니다. 이들은 경기 내내 끊임 없이 움직이며 공격 조율, 침투, 공간창출, 키 패스, 골 결정 등 올라운드 공격수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요. 이 역할을 가장 완벽하게 수행했던 선수가 바로 바조입니다. 바조는 공격을 조율하며 패싱플레이를 했으며 사방의 압박으로 부터 탈압박을 하고 필요한 경우 세컨 스트라이커로써 골을 넣었습니다. 다시말해 클래식 9번(골게터)과 10번(플레이메이커)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9.5번의 선수로써 플레이를 한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토티의 등장이후에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선수를 일컬어 트레콰르티스타 라고 표현하지만 당시에는 이와 같은 개념이 모호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판타지스타라는 단어가 단순히 역할에 의해 불려지는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죠.
(9.5번으로써의 역할 수행과 화렴함, 스타성은 그를 판타지스타로 불리게 했다.)
화려했던 93년을 보낸 바조는 운명의 94년을 맞게 됩니다. 94년은 월드컵이 열리는 해로 전성기를 보내던 바조에게 4년전의 아픔을 지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1990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첫 출전하여 5경기 2골이라는 활약을 했지만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에 승부차기에서 패해 4강 탈락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이탈리아의 스쿼드를 보면 수비진은 당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AC밀란의 4백, 말디니, 바레시, 코스타쿠르타, 타소니를 통째로 데려왔고 알베르티니, 디노 바조등 뛰어난 선수들이 미드필드진에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공격진 또한 카시라기, 졸라, 그리고 바조 등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로 공수 밸런스가 아주 잘 갖춰진 팀이었죠. 시작은 좋지 못했습니다. 조별예선에서 E조에 포함되어 노르웨이, 멕시코, 아일랜드를 맞서 싸워 1승 1무 1패를 기록 했습니다. 그런데 E조에 있던 4개 팀이 모두 1승 1무 1패를 기록하게되는 진귀한 광경이 발생하게 됩니다. 심지어 골득실까지 0점으로 같았습니다! ㅎㅎ 2위 아일랜드와는 득점수와 실점수까지 같아 승자승 원칙에 따라 3위(아일랜드에게 패)로 간신히 16강에 오르게 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94년 월드컵까지는 본선진출국이 24팀이어서 6개조 2위팀까지 12개 팀과 3위들간 비교우위를 통해 추려낸 4팀을 합해 16강 토너먼트를 진행했습니다. 일단 16강에 올라가게 되자 바조는 판타지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16강 나이지리아전, 졸라가 퇴장당한 이탈리아는 후반 40분이 넘도록 1:0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패색이 짙어질 무렵인 후반 43분 바조는 동점골을 터트리며 팀을 탈락위기에서 구해내고 연장에서 페널티킥까지 집어 넣으며 팀을 8강에 올려 놓습니다.
(16강 나이지리아전)
8강에서는 강호 스페인과 맞붙게 되는데 1:1로 접전이 펼쳐지고 있던 후반 42분, 바조는 다시한번 극적인 결승골을 작렬 시킵니다.
(8강 스페인전)
4강상대는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로 바조는 이대회 최고의 활약을 하게되는데 전반 20분과 25분에 연달아 골을 터뜨리며 팀의 2:1승리를 이끕니다. 일련의 활약으로 바조는 이탈리아 내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며 온갖 찬사와 칭송을 받게 됩니다.
(4강 불가리아전)
그리고 운명의 결승전, 이탈리아는 브라질과 맞붙게 되었습니다. 당시 라리가를 지배하고 있던 두 스트라이커 호마리우와 베베토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못지 않은 스타플레이어들로 포진된 브라질이었지만 브라질 답지 않은 수비적인 경기운영을 선보이며 꾸역 꾸역 결승에 올라온 브라질과 판타지스타 바조의 활약으로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하며 올라온 이탈리아의 대결은 전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센터백 코스타쿠르타가 징계를 받아 결승전에 뛰지 못하게 되면서 임시 방편으로 사이드 백이었던 말디니가 센터백을 서게 됩니다.(후에 센터백으로도 성공한 말디니였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센터백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갑작스런 수비진 변경으로 인해 조직력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아라고 사키 대표팀 감독은 수비 위주로 경기를 하며 알베르트니와 바조를 이용한 역습에 치중하게 됩니다. 브라질 역시 대회 내내 수비적인 경기로 임했지만 바조의 돌파력과 결정능력에 대비하기 위해 더욱 수비적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치열한 공방이 오고갔지만 결과는 연장종료때까지 0:0. 승부를 가리지 못하게되면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결승 승부차기로 승패를 결정짓게 되는 얄궃은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결과는 바조의 마지막 실축과 함께 3:2 브라질의 승리로 우승컵은 브라질로 돌아가게 되죠.
선수 생활에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다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 PK는 다시 차고 싶다. 나는 매일밤 악몽에 시달렸었다. - 은퇴 당시 바조의 말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는 판타지 스타)
4강전까지 구국의 영웅이었던 바조는 페널티킥 실축과 함께 국민역적(?)이 되버립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팬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바조의 인형을 불태우고 초상화를 찢어 버리기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바조 역시 큰 심적 고통을 겪었는데요 설상 가상으로 유벤투스로 새로 부임하게 된 마르셀로 리피 감독은 공개적으로 바조가 팀전술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주전 기회를 조금씩 앗아갔습니다.(2002년 페루자 안정환 사태도 그렇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축구 사랑은 과한측면이 있네요.ㅎㅎ) 불운은 이어서 찾아온다고 11월에는 무릎 부상이 재발되면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그 무렵 리피 감독은 델 피에로를 데려오는데 바조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메꿔버리면서 리피 감독은 델피에로 중심의 팀을 꾸려나가게 되죠.(훗날 델피에로 역시 판타지스타로 불리며 바조와 비교 되곤 합니다) 시즌 말미에 부상에서 복귀하고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맛보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팀내에서의 입지를 잃게 되고 결국 팀을 떠나게 됩니다.(그가 팀을 떠나기전 구단과 리피 감독은 그에게서 10번을 뺏어 델피에로에게 넘겨줌으로써 그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밟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무슨 연유인지(94월드컵의 여파라기 보단 팀전술을 강조하는 이탈리아 감독들 성향상 판타지스타의 프리한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거 같습니다.) 바조는 감독들에게 신뢰를 많이 받지 못하는데요 95년 여름 이적하게 된 AC밀란의 파비오 카펠로 감독, 후임인 아리고 사키 감독, 후에 이적하게되는 볼로냐의 렌조 울리비에리 감독 모두와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95/96시즌에 AC밀란의 우승으로 2번째 리그 트로피를 얻게 되지만 리그와 컵대회 포함하여 10골 밖에 넣지 못하는 등 그의 활약은 만족스럽지 못 했습니다. 다음해 카펠로 감독이 레알마드리드 감독으로 떠나면서 아리고 사키 감독 부임하게 되는데 그는 94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화를 살펴보자면 경기중 골키퍼가 퇴장당하자 사키 감독은 바조를 빼고 후보 골키퍼를 투입했다고 하는데요. 바조에 대한 사키 감독의 평가를 유추해볼만한 대목인거 같습니다.(당시 팀이 기록한 8골중 5골을 넣을정도로 바조는 팀의 에이스였습니다.) 96/97시즌 AC밀란이 리그 11위의 부진을 하며 사키 감독이 해임당하게 되면서 카펠로 감독이 돌아오게 되는데요 카펠로 감독은 아예 바조를 전력외 자원으로 분류해버립니다. 설곳을 잃은 바조는 쫓겨나듯 볼로냐로 이적하게 되는데 97/98시즌 리그 30경기에서 22골을 넣는등 여전히 좋은 기량을 과시합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바조는 98년 다시한번 월드컵 무대에 설수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여기에 한가지 운이 더따르게 되는데 바로 그의 대체자였던 델피에로의 부상입니다. 델피에로는 월드컵 직전 부상을 당해 조별예선에 출전할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4년간 그를 괴롭혀오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까요 바조는 이 대회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뜁니다. 조별예선 첫번째 상대는 당시 최대의 다크호스로 부상중이던 칠레였는데요. 칠레 역사상 최고의 투톱이라고 불리는 살라스와 사모라노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조의 어시스트에 이은 비에리의 골로 앞서 나갔지만 살라스의 연속골로 1:2 역전을 허용하며 끌려가게 됩니다. 경기 막판까지 칠레의 밀집수비를 뚫지 못한채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 판타지스타가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발휘합니다. 페널티 박스 안에 있던 수비수의 팔을 일부러 맞춰 패널티 킥을 얻어낸것이죠. 본인이 얻어낸 패널티 킥을 직접 차 넣으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이 골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바조에게 있어서도 큰의미가 골이었는데요. 바조는 이골로 3개의 월드컵에서 득점한 최초의 이탈리아인이되었습니다. 또한 4년 결승전 PK실축의 악몽같은 트라우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훗날 바조는 이골을 두고 '해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3개의 월드컵대회에서 득점한 최초의 이탈리아인이 되는 순간)
바조는 계속해서 활약을 이어가는데요 조별예선 2번째 상대인 카메룬을 상대로 디비아조의 첫번째 골을 어시스트 하였고 마지막 조별에선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인 월드컵 통산 최다골(9골)을 기록하게됩니다.(파울로 로시와 동률) 조별예선에서만 4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한 바조의 활약 덕분에 이탈리아는 2승 1무로 무난하게 16강에 진출하게 됩니다. 토너먼트에 오르자 당시 이탈리아 감독이었던 체사레 말디니(파울로 말디니의 아버지)는 바조의 조별예선 활약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전에 계획했던 델피에로 중심의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조별예선 부터 바조와 교체투입시키며 부상에서 갓 돌아온 델피에로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던 말디니 감독은 토너먼트에 올라가자 델피에로를 스타팅멤범로 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16강 상대는 조별예선에서 브라질을 꺾으며 상승세를 타고 있던 노르웨이였는데요. 어려운 경기로 일관하다 비에리의 골에 힘입어 겨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물론 부상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은 델피에로의 경기력 역시 기대 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디니 감독은 8강전에서도 델피에로 카드를 고집하게 되는데요 하필이면 상대는 개최국이자 숙명의 라이벌인 프랑스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철의 4백이라 불리는 막강한 수비라인과 지네디 지단이라는 걸출한 플레이메이커가 있었는데요. 선발 출장한 델피에로는 프랑스의 수비진에 막혀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경기또한 프랑스의 흐름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바꿔보고자 델피에로 대신 바조를 교체 투입하였고 투입과 동시에 바조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며 프랑스 수비진이 휘젓기 시작했습니다. 전후반 경기에서 가리지 못한 승부는 연장전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알베르티니의 로빙패스를 받어 날카로운 발리슛을 날렸지만 골대를 외면해버렸습니다. 결국 0:0으로 경기가 끝나면서 다시한번 승부차기를 하게 되는데요. 이때문에 바조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3개 대회 연속 승부차기 경험자가 됩니다. 첫번째 킥커로 나선 바조는 슛을 성공시켰지만 이탈리아가 3:4로 패배하게 되면서 승부차기는 그에게 평생 넘지 못하는 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3개대회 연속 패배)
(이 슛이 들어갔더라면..)
또 한번 월드컵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소기의 성과(2번의 pk기회를 모두 넣었다!)를 거두고 볼로냐로 돌아왔지만 렌조 울리비에리 감독과의 불화로 다시 팀에서 나와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유럽 제패를 꿈꾸고 선수를 모으고 있던 인터밀란의 레이더 망에 포착되어 인터밀란으로 이적을 하게됩니다. 인터밀란 수뇌부는 전 시즌 영입한 스트라이커 호나우도와의 시너지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죠. 허나 호나우도와 바조 모두 잔부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바조는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죠. 또 둘의 뚜렷한 플레이 스타일 덕분에 생각보다 호흡이 맞지 않기도 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둘의 조합은 실패로 끝나면서 당해 시즌 인테르는 무관에 그치게 됩니다. 이에 구단 수뇌부는 감독 교체를 결정하게 되는데 하필 데려오는 감독이 유벤투스의 리피였습니다. ( 그렇습니다. 바조를 내친 바로 그 감독입니다.) 리피는 의도적으로 바조를 교체 멤버로만 썼고 바조는 그런 감독의 결정에 항의라도 하듯 경기에 나설때마다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좋은 활약에도 계속되는 벤치 신세를 하게 되면서 둘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는데 결국 바조가 공개적으로 리피 감독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호나우도가 큰부상을 당하면서 장기간 아웃이 됐음에도 리피는 바조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습니다.
이 무렾 바조에게는 또하나의 악재가 곂쳤는데 대표팀감독이었던 디노 조프는 세대교체 필요성과 소속팀에서의 입지를 고려하여 바조를 유로2000 멤버로 발탁하지 않았다는것입니다. 2000년 당시 바조의 나이는 33세로 노장이었고 무릎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레 주위에서 은퇴권유 등 좋지 못한 평을 듣고 있었지만 바조는 다시한번 대표팀에서 뛰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2002 한일 월드컵에 있었죠. 목표 달성을 위한 첫번째 단계로 그는 소속팀을 옮기기로 합니다.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뛸수 없으면 국가대표에 발탁될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죠. 그 결정에 따라 이적하게 된곳이 만년 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브레시아 입니다. 노쇠화와 부상을 동시에 겪고 있음에도 그는 이적 첫시즌에 10골 10도움을 올리는 활약을 합니다. 그즈음 국가대표 감독은 트라파토니 감독으로 유벤투스 시절 바조의 감독이기도 한 바조의 은사였죠. 소속팀에서의 활약, 자신에게 호의적인 대표팀 감독 등 바조의 대표팀 재승선은 호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릎은 그의 4번째 월드컵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10월 왼쪽 무릎 부상으로 3개월간 결장하였고 다음해 1월 잠시 복귀했지만 통증 재발로 수술대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나는 기적을 믿는다"며 전치 4개월의 부상에서 77일만에 복귀해 리그경기에서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2골을 넣는 등 투혼을 불사르지만 트라파토니는 바조의 컨디션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대표팀에 발탁하지 않습니다. 바조는 심부름만 해도 좋으니 대표팀에 승선만 시켜달라는 편지까지 보냈으나 끝내 그의 바람을 이뤄지지 않게됩니다. 대표팀에서 탈락한 이후 기존 자신이 세웠던 2002년 월드컵 이후 은퇴를 세리에 200호골 달성 이후 은퇴로 변경합니다. 정말 대단한 투혼의 소유자이죠.. 2002년 12월 15일 페루자를 상대로 개인 통산 300호골을 넣었으며(실비오 피올라와 쥐세페 메이자 이후 50년만에 나온 이탈리안 기록) 2004년 3월 14일 파르마를 상대로 기어코 세리에 200호골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언론과 팬들은 일제히 그의 인간승리에 경의를 표했고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자국의 살아있는 전설을 기리고자 국가대표 은퇴경기를 열어주기로 결정합니다. 이로써 바조는 그토록 다시 달고 싶었던 국가대표 마크를 달고 2004년 4월 28일 스페인과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경기를 치뤘으며 2004년 5월 16일에 산시로에서 밀란을 상대로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축구화를 벗었습니다. 최종적인 그의 통산기록은 세리에 205골, 개인 318골로 실로 위대한 업적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브레시아는 그를 기리기 위해 10번을 영구결번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그가 판타지스타로 불리는건 그가 9.5번, 트레콰르티스타라는 롤을 완벽히 수행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가 판타지스타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공을잡았을때 관중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해낼거 같다는 생각을 갖게하고 또 그것을 실제로 실현해냈기 때문입니다. 특히 큰경기에서 임팩트 있는 활약을 많이 해냈으며 국가대항전에선 그 활약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실제로 그가 국가대표로 득점하였던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단한번도 패배한적이 없습니다.(22경기 득점, 18승 4무)
시대가 바뀌면서 축구는 좀더 조직화되고 간결한 플레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팀적인 플레이들이 팀의 안정성과 더나은 승률을 가져오기 때문이며 바라보는 팬의 입장으로써도 조직력있는 팀의 축구를 보면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한명의 영웅적인 선수가 등장하여 번뜩이는 플레이를 통해 혼자서 뭔가 해냈겠다는 느낌이 들게하고 실제로 그것을 이뤄내는 장면을 볼때의 쾌감을 느끼고 싶을때가 있습니다.(최근 몇년간은 메시를 제외하고 별로 느껴본적이 없습니다.) 불과 십수년전까지 그런 장면들을 일상처럼 만들어내던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를 추억하며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갑사합니다.
"돈츄의 Super S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