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은 개성·문산지구 전투(38도선 경계진지 전투, 임진강 방어선 전투, 봉일천 전투)의 두번째 시간으로 임진강 방어선 전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임진강 방어선 전투는 다시 크게 문산 전투, 파평산 전투로 나눠 볼수 있다.
(임진강 방어선 전투 개황지도 / 출처 : 전쟁기념관)
(임진강 방어선 전투 작전요도 / 출처 : 한국 전쟁사)
1. 문산전투(11연대, 보병학교 교도대)
- 아군 상황
- 25일 고랑포-청단간 38도선 경계진지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아군(12, 13연대)이 임진강 이남으로 철수 시작
- 이에 따라 아군의 방어전면은 90여km(고랑포-청단)에서 20여km(임진강 방어선)로 줄어듬.
- 38도선 주둔 아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수색에 주둔하고 있던 사단 예비 11연대에 비상경보 발령 → 8:30경 비상소집(일부 출타 병력 복귀) → 연대장 부재 상태(사단장 대리)에서 채병덕 참모총장 연대 불시 방문 및 격려 → 문산 출동 명령(연대장)에 따라 준비된 병력부터 문산으로 이동.(11:00~15:00 간 1차 488명, 2차 131명, 3차 361명 이동)
- 11연대본부는 적전리(문산 동남쪽 1km)에 배치, 좌일선에 1대대(대위 고한조), 우일선에 2대대(소령 정영홍)를 배치하고 3대대(소령 김재명)는 연대예비로 본부와 함께 배치
- 연대의 방어정면은 임진강의 만곡부로 강이 둘러싸 천연 장애물 역할을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만곡부의 좌측은 병력이 부족.
- 11연대장은 개성에서 철수하는 12연대 엄호와 전방 경계를 위해 임진강 북쪽에 병력을 배치할것을 2대대에 지시 → 2대대장은 13:00 경 7중대로 하여금 임진강 북쪽 구릉 점령 및 임무수행 지시 → 7중대 임무수행 중 15:00 경 적 선두 기마부대 격퇴 및 임진강 전방 3km부근에서 접근중인 대규모 적 감지후 본대로 철수
- 12연대의 철수후 임진강 철교를 폭파 시도 → 남쪽 교량(경의선)은 성공하였으나 북쪽 교량(인도교)은 실패
채병덕 참모총장은 11연대 방문시 "11연대는 송악산 전투떄와 같이 용감하게 싸우라"라고 격려한것으로 알려졌는데 여기서 송악산 전투는 한국전쟁 1년전인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에서 38도선 남쪽의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한국군 1사단 11연대와 북한군 1사단 3연대와 벌인 고지전을 말한다. '육탄 10용사'의 활약으로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4개 고지를 탈환하였다.
- 전투 경과
25일 자정 무렵 11연대의 좌일선(문산 돌출부의 최선단)인 1대대의 강변초소에서 적이 임진강 철교를 통해 남하하는것이 관측 되었다. 철교를 건너온 적은 강안을 따라 좌우측으로 산개 하였고 전차 5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1대대는 적 전차가 방어진지 전방 500m 까지 접근하길 기다렸다가 기습적으로 대전차포를 발사하여 선두에 있던 전차를 명중시켰지만 적 전차는 별 다른 피해 없이 계속 접근하며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곧이은 두번째 대전차포 공격 역시 무위로 돌아가자 전차 5대를 앞세운 대규모 적병력이 순식간에 대대 중앙을 돌파하여 예비대지역까지 진출함으로써 치열한 교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혼전 상황에서 1대대는 분전하였지만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6일 9:30분 경 문산 외곽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한편 25일 오후 늦게 11연대에 증원 배속된 서울특별연대 예하의 보병학교 교도대(소령 김병화)는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상대적으로 취약한 문산의 서측방 굴촌리 부근에 배치되는데 26일 새벽이 되어서야 진지 편성을 완료하였다.
11연대장은 1대대의 주저지선이 무너지자 임진강 방어선 전체의 밸런스가 깨질것을 우려해 예비대인 3대대로 하여금 1대대 증원 및 역습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3대대는 1대대의 저지선까지 2km의 거리를 신속히 이동하여 1대대와 함께 역습에 돌입하게 되는데 1대대장 고한조 대위는 역습명령에 격분하여 돌연 연대본부로 내려가면서 부대대장 고임현 대위가 대대를 지휘를 맡게 되었다.
3대대의 증원에 의해 전선이 어느정도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지만 3대대의 좌측방에서 새로이 등장한 중대 규모의 적에의해 3대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연대장은 굴촌리 부근에 주둔하던 교도대대로 하여금 3대대의 좌측방으로 역습해 들어갈 것을 지시하였다. 적의 측 후방에 있던 교도대대가 역습을 개시하여 좌측방에 등장한 적을 제압하고 다시 임진강 강변까지 진출하였는데 1,3대대의 분전 역시 이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저녁 우인접 부대인 13연대 2대대쪽으로부터 등장한 전차와 북한군이 연대의 우일선인 2대대를 직접공격함과 동시에 대대 측후방을 우회하여 문산에 압박을 가함에 따라 그 기세가 오래가지 못하였다.
2. 파평산 전투(13연대 1대대, 2대대, 육사교도대)
- 13연대 1대대(파평산-금파리)
13연대 1대대(소령 김진위)는 24일 대대전술훈련차 문산초등학교 분교가 위치한 자하리 부근에서 야영하고 있었다. 25일 새벽 4:30경 고랑포 방면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대대인원 대부분은 으레 있는 북한의 도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상황파악을 위해 연대와의 연락을 시도하는 한편, 강건너 북쪽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고랑포를 감시하던 초병으로부터 "북쪽으로 부터 많은 병력이 내려온다"는 보고를 받고 적의 남침임을 확인, 각 중대로 하여금 진지 점령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간신히 연대와 연락이 통한 대대는 계속해서 탄약 보급을 요청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탄약 보급 및 분배가 완료된 시각은 10:30경 이었다. 이때 고랑포-자하리 방면에서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제 1대대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들은 파평산 정면의 덕현리로부터 산개하여 진지 정면을 가로지르는 320번 도로를 횡단하면서 대대의 우일선인 3중대와 중앙일선인 1중대에 소총 사격을 가하였다. 동시에 진지 정면에서 동서로 흐르는 냇가에 접근하고 있었는데 이 소하천은 대대의 작전계획에 따른 탄막지대였다. 대대장은 이를 이용하여 적들이 하천을 건널때까지 사격대기를 지시하다가 건너는 순간 일제사격을 가하여 적을 제압하였다. (105mm포와 81mm박격포 포함)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패주하였는데 많은 적들이 아군의 탄막범위 안에서 쓰러졌다. 간신히 살아남은 적 병력은 덕현리 지역으로 철수 하게 되었다.
14:00 경 적성쪽으로부터 적 전차가 진지 정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두의 전차 5대가 320번 도로상에서 종대로 멈춰 선채 포신만 돌려가며 공격을 가하였는데 덕분에 전차 좌측면을 아군에게 훤히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이를 간파한 대대장은 즉각 1중대와 3중대로 하여금 2.36인치 로켓 공격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중대 우측소대와 3중대 좌측소대는 2.36인치 로켓포로 일제 사격을 가하였는데 500~600미터라는 거리와 전차 장갑의 위력 때문인지 공격은 무위에 그치고 만다. 이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은 크게 동요 하였는데 대대장은 군의 사기를 고려하여 적의 전차를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특공대를 선발한다. 특공대는 18명으로 2개조로 편성되었으며 81mm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포탄으로 무장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적 전차에 돌진 하여 급조폭탄을 전차 궤도에 투척, 파괴하는것이었다. 그때 적전차들은 320번 도로를 따라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는데 대대 좌일선인 2중대 앞을 지날때 2중대가 2.36인치 로켓포를 일제 사격하자 멈춰선채 반격을 시작하였다. 이틈을 이용하여 특공대가 전차를 공격, 성공하여 전차 5대를 파괴내지 획득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 후에도 적의 후속전차가 진지 정면에 출현하였으나 앞서 파괴된 전차로 길이 막혀 되돌아갔다.
그후에도 대대급 및 연대급 규모의 적이 계속해서 공격해오는데 81mm 박격포와 105mm포를 적절히 활용한 사격전을 펼치며 26일 오후 까지 적을 격퇴해 나간다. 1대대의 이러한 활약이 가능했던것은 지휘관과 병력들의 활약도 있었지만 일찌감치 파평산이라는 유리한 감제고지에 진지를 편성하였기 때문이다.
- 13연대 2대대(금파리 서단-율곡리) 및 육사 교도대
2대대는 연대의 좌일선으로 금파리 서단에서 율곡리 부근에 이르기까지 임진강변을 따라서 남서방향으로 사선으로 진지 편성하였다. 연대 우일선 1대대가 전 전차를 맞아 전투를 벌이고 있을때 쯤을 기점으로 2대대도 적과의 교전이 시작됐는데 해가 저물면 피아 포병의 요란사격과 함께 연대 정면에서는 밤새도록 사격전이 전개되었다.
26일 아침 고랑포쪽에서 임진강을 도하한 대대규모 이상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하는데 얼마간의 집중사격 후 1번도로를 따라 전차가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2대대는 대대 중앙을 직접 타격받았는데 반격을 위해 57mm 대전차포를 사용하지만 그 효과는 미미 하였다. 계속되는 적의 공격에 의해 결국 우일선 중대가 분산하게 되었고 우인접 부대인 1대대와의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발새하게 되었다.이에 연대 본부는 고랑포에서 후퇴하여 금곡리에 집결하고 있던 3연대로 하여급 역습을 감행하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25일 저녁 무렵 연대에 배속된 서울특별연대 예하의 육사교도대(소령 김응용)가 문산에서 부터 밤샘 행군을 하여 1대대 우측방의 357고지(연대 우측방)를 점령하는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밤사이에 이미 적군이 357 고지의 정상을 점령하여 어쩔수 없이 고지 서쪽의 무명고지(230m)를 점령할수 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한 탓에 고지에 묶인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고 연대본부는 연대 우측방의 방어를 위해 연대 직할대 2개 중대를 증파하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대위 유중수를 중심으로 연대 직할대 2개중대가 편성되어 출동 준비를 하는 가운데 357 고지에 남하 우회한 적 1개중대에 의해 육사 교도대가 공격 받으면서 갑작스럽게 철수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육사 교도대를 후방에서 지원하단 포병 중대(전남식 중위)는 105mm 포 2문을 미쳐 회수 하지 못한채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교도대장 소령 김응용은 실종하게 되고 1중대 선임장교 중위 최재균은 과다출혈로 전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육사의 중대장 대위 김철수가 교도대를 이끌고 봉일천으로 철수하였다. 포병 2중대장 중위 전남식은 포를 잃은 자책으로 봉일천으로 철수하는 도중 수류탄으로 자폭하였다.
- 봉일천으로의 철수
1사단장 대령 백선엽은 사단 좌일선인 11연대의 성공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우일선인 13연대가 붕괴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전황은 13연대 2대대의 우일선이 돌파 당하면서 1대대와 2대대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 2대대의 화력이 우측방으로 집중되고 있을때 적 전차부대가 1번도로를 따라 2대대 진지 정면을 횡단하며 11연대 우일선인 2대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단장은 철수 명령을 하달하는데 자칫 연대의 퇴로마저 차단당할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철수 결정을 내리는것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철수 결정에 따라 26일 야간에 대대적으로 철수를 시작하였고 13연대 1대대는 마지막으로 27일 여명과 함께 파평산에서 철수 하였다. 사단 본부는 봉일천 초등학교에 세워졌으며 이에 앞서 금촌 지역에 도착한 15연대 3대대로 하여금 진지공사를 완료하도록 하였다. 또 그 우측방에 20연대 3대대를 배치하여 전방 상황에 유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돈츄의 Super S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