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산임수의 위치라 할지라도 초가집도 잘짓고 논밭도 열심히 일궈야 운이 들어오는 법이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김포반도에서의 국군은 명당자리를 차지하고도 물만 떠놓고 재수좋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전쟁에서 준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것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이자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발발 1년전 전라 좌수사로 부임해 거북선 건조를 포함한 군비를 충실히 하는데 열과성을 다함을 알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 2주전에는 열흘여 동안 150km에 달하는 군영을 직접 돌아보면서 전쟁준비상태를 확인 또 확인한다. 준비 없는 승리는 없다라는것을 몸소 보여준셈.
반대로 한국전쟁 초기 우리군이 겪었던 연전연패 역시 '준비성'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그래서 준비가 부족했다. 그런데 김포반도에서는 한발 더나갔으니 아예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단 1명의 병사도 방어계획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강건너 개성지구의 패배는 곧 김포반도의 헌납을 의미하는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왜 아무런 방어계획도 없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김포반도는 최전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반도앞은 1사단이 지키고 있었고 혹시 적군이 도하를 시도하더라도 2~3km에 달하는 강폭과 빠른 유속,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이를 자랑하는 한강-서해간의 천연 장애물을 북한이 쉽게 넘어오진 못할거라는 안일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만들어낸 준비부족이었다. 한마디로 방심과 과신의 산물.
실제로 전쟁전 1사단에서 '유사시 연백-개성지구(개성문산지구 전투 참고)를 포기하고 임진강선 방어에 치중한다'는 방어계획을 육본에 승인 받았음에도 육본은 개성지구 공백에 따른 김포반도의 위험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강화·김포 전투 개황지도 / 국방부 한국전쟁사
다행(?)스럽게도 25일 저녁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강화,김포방면으로의 도하준비 징후를 빠르게 포착하게 된다. 그에 따라 육군본부는 급히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게 되는데 사령관에 보병학교에서 교육중이던 대령 계인주(남상학교장)를 원대복귀 시킴과 동시에 임명하였으며, 남산학교(사령부), 보병학교 후보생, 공병학교 학생, 보국대대, 12연대 2대대, 독립기갑연대 일부(장갑소대)등이 소속하게 된다. 사령부는 병력들이 김포읍에 도착하는대로 김포반도 서북단의 문수산을 중심으로 하여 조강리-강녕포 라인(12연대 2대대)과 염하변(독립기갑연대)에 배치, 방어케 하였다.
그러나 김포지구는 육군본부의 주요관심사인 1사단 방어전선에 밀려 적절한 전투자원을 지원받지 못한다. 먼저 사령관으로 임명된 대령 계인주는 정보통으로 군생활내내 정보장교로 지낸, 작전에는 문외한인 인물이었으며 각부대에서 차출되어 모인 혼성부대를 지휘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수 밖에 없었다.
또 부대는 각 학교기관의 후보생/교육생들과 귀순장병 중심의 보국대대, 개성전투로 전력 손실을 입은 12연대 2대대, 기갑연대 일부 병력등으로 구성되어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실제 학교로부터 차출된 후보생들 중 일부는 아직 실탄사격 경험이 없는 상태였으며 그마저도 훈련시 사용하던 M1소총이 아닌 38식 또는 99식 일제소총을 지급 받는 경우가 있었다.(일제소총은 잦은 고장으로 효용성이 많이 떨어진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통신수단이 확보되지 않아 지휘계통이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26일 밤 통진을 중심으로 서북단에 3개대대가 배치 되었는데 각 부대는 자신들만이 배치된 것으로 알정도였다. 조직적인 도하저지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셈.
하지만 준비 다될때까지 기다려 주는 적은 없는법. 25일 개성지구를 점령한 북한군은 26일 바로 한강도하에 돌입한다.
전투 전개 상황
➀ 26일 16:00 12연대 2대대와 기갑연대의 배치가 대강 마무리됨. → 이때 쯤 하여 적의 도하정찰 시작.
➁ 북한군, 피난민을 가장하여 도하 → 본격적으로 도하정 이용 : 석유포로부터 조강리로 상륙 시도 → 조강리로 증원된 장갑차의 37mm 격침/저지
➂ 26일 밤 180고지 서쪽으로 강화도로부터 도하 및 침투 → 자정무렵 보국대대 무너짐 → 통진 동남쪽 보병대대 공격받음
➃ 26일 밤 북한군 일부 강녕포 동남쪽 도하 성공
➄ 27일 아침 영정포에서 강녕포와 조강리 일대를 향한 북한국 122mm 지원사격 → 강녕포를 향한 대대적인 도하 시도
➅ ➃의 북한군 부대의 호응 → 강녕포-통진 라인 차단시도 → 적의 포격과 퇴로차단 위협 때문에 12연대 2대대 일부와 장갑소대 통진으로 철수
전투 전개 상황2
➆ 북한군 주력 강녕포 상륙 → 12연대 2대대 나머지 병력 통진으로 철수
➇ 통진에 집결한 혼성부대 → 교통의 요지인 장림으로의 철수 결정
➈ ➂의 북한군 일부가 남쪽으로 우회하여 퇴로차단 시도
➉ 장갑차 내세워 돌파 → 27일 11시경 장림에 새로운 저지선 구축
하편에서 계속.
"돈츄의 Super Save"